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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장자 나를 깨우다 정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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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나를 깨우다



1. 자유인 장자


1) 戰國時代의 지식인

장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한 가운데에 살았던 한 가난한 지식인이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는 말 그대로 ‘전쟁의 시대’였다. 

현재 우리는 장자의 역사적 삶의 행적에 대해서는 주로 사마천의 {사기}에 의존하게 되는데, {사기}에서는 장자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자는 몽(蒙) 지역의 사람이고 이름은 주(周)다. 장자는 일찍이 몽(蒙) 지역에서 칠원리(漆園吏)를 한 적이 있으며, 양(梁)나라의 혜왕(惠王)과 제(齊)나라의 선왕(宣王)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 그의 학문은 살피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방대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노자의 사상을 그 중심처로 삼았다.(莊子者, 蒙人也, 名周. 周嘗為蒙漆園吏, 梁惠王‧齊宣王同時. 其學無所不闚, 然其要本歸於老子之言.)


사마천은 장자가 ‘칠원리’(漆園吏)라는 벼슬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정식 벼슬이라기보다는 한낱 보잘 것 없는 관리인 정도로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장자는 재물과 관직에 초연했으므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고, 때로는 너무도 가난해 종종 이웃 사람에게 양식을 빌리러 다니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고단한 삶은 그가 우화의 소재로 삼고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우화의 주인공들은 불구자, 형벌 받은 죄인, 미치광이, 목수, 백정, 추남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무시되고 천대받는 소외 계층의 사람들이다. 

한편, 사마천은 장자가 살았던 당시가 양(梁)나라의 혜왕(惠王)과 제(齊)나라의 선왕(宣王)과 동시대였다고 말하는데, 이 두 임금은 맹자가 자주 언급하고 그가 실제로 대면하였던 군주들이다. 따라서 장자와 맹자는 동시대에 살았던 셈이 된다.

마지막으로, 사마천은 장자가 “살피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박학다식하다고 말하면서 장자 사상의 궁극적인 귀착지는 노자사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장자의 사상은 큰 틀에서는 노자사상과 상통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 구체적 성격을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면이 많기 때문이다. 노자와 장자는 ‘도’를 기본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의미의 ‘도가’라는 틀은 공유하고 있지만 그 구체적 색깔은 서로 다르다.


2) 장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나

장자는 중국 역사상, 아니 어쩌면 동양 역사상 가장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구속과 속박을 벗어난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서 노니는 것을 추구하였다. 세상에 머물되 세상을 넘어서는 초월적 자유를 지향하였다. 이 점은 그가 그의 글 첫머리에 [소요유]편을 배치하였다는 사실에서 언뜻 눈치 챌 수 있다. 

우리 모두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그런데 우리가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세속의 영역에 얽매여 그것을 초월하는 경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자는 「소요유」편에서 우리를 일상의 협소한 세계에서 끌어내어 저 넓고 광활한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즉 장자는 우리에게 ‘열려진 드넓은 공간’을 펼쳐 보임으로써 정신적 해방감을 맛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선 깨어나야 한다. 현재 내가 잠을 자고 있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이 꿈속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거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또한 자유롭기 위해서는 변화해야 한다. 현재의 나에 고착되어 있지 말고, 일상적인 나에 머물지 말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변화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깨어남과 변화를 통해 존재는 그 실상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것은 ‘고름’(均)이요 ‘무차별’이다. 장자는 그 세계를 ‘제물’(齊物)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일상의 속박과 구속으로부터 초월한 자만 인식할 수 있는 세계다. 

장자가 ‘제물’을 주장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차이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개별적인 차이를 지극히 존중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사물간에는 개별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것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제물’이란 만물을 고르게 대한다는 의미, 보다 구체적으로는 만물의 가치를 동등하게 바라본다는 말이다. 나와 너를 구분하거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이 없는 무차별의 인식 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무차별의 세계는 어떻게 확보되는가? 그것은 ‘나를 잊음’ 즉 ‘상아’(喪我)로부터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장자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인간상에 알아보자. 장자는 이상적 인격의 특징으로 ‘삼무’(三無)를 제시한다. 즉 [소요유]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인은 무기(无己)하고, 신인은 무공(无功)하며, 성인은 무명(无名)하다.”(至人无己, 神人无功, 聖人无名.) 

장자는 이러한 이상적 인격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좌망(坐忘) 심재(心齋) 견독(見獨)과 같은 수양법을 제시한다. 좌망(坐忘)은 ‘앉은 채로 잊어버린다’는 말인데, 몸과 마음을 모두 잊은 상태 무념 무상의 경지에 든 것을 의미한다. 심재(心齋)는 마음을 텅 비워 자연과 하나가 된 상태를 가리키며, 견독(見獨)은 절대적인 경지를 봄 즉 도를 깨달은 것을 말한다.



2. 대붕의 비상


북명(北冥)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곤’(鯤)이다. 곤은 매우 거대하여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 물고기는 새로 변하였으니 그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몇 천리나 되었는데, 한번 힘써 날아오르면 그 펼쳐진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워진 거대한 구름과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일렁거려 큰 파도가 일면 남명(南冥)으로 날아갈 준비를 한다. 남명은 천지(天池) 즉 ‘하늘 연못’의 이름이다.

기이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제해(齊諧)라는 책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붕이 남명으로 옮겨갈 때는 파도가 3천리나 치솟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리 상공으로 날아올라가며, 6개월 동안 날아간 이후에 내려와 쉰다.” 

아지랑이와 먼지는 생물들이 숨을 쉼으로써 서로 뿜어내는 것들이다. 하늘이 푸르고 푸른 것은 하늘의 본래 색깔인가? 아니면 너무 멀어서 아득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9만 리 상공 위에서 내려다보면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또한 물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마루 위의 오목한 곳에 한 잔의 물을 부어 놓으면 지푸라기 정도는 뜨지만 잔을 띄우면 바닥에 들러붙는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거대한 날개’ 즉 붕새를 실을 힘이 없다. 그러므로 붕새는 9만리 상공으로 날아올라야만 바람이 배 아래에 놓이게 되고, 그런 이후에 바람을 탈 수 있는 것이다.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앞에 아무것도 가로막는 게 없는 이후에야 비로소 붕새는 남쪽으로 향해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매미와 비둘기가 붕새를 비웃으며 말하였다. “우리는 힘껏 날아봐야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겨우 다다를 뿐이고,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 저 붕새는 뭣 때문에 9만 리나 날아올라 남쪽으로 간단 말인가?”

가까운 교외로 놀러가는 사람은 세 끼 식사만 하고 돌아와도 여전히 배가 부르다. 그러나 백 리를 가는 사람은 밤새워 곡식을 찧어야 하고, 천리를 가는 사람은 삼 개월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그러니 저 매미와 비둘기가 어떻게 저 붕새의 거대한 비상을 이해하겠는가? (逍遙遊)



1) 소요유

{장자} 첫 편은 [逍遙遊]로 시작된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장자 사상의 중심 이념이 바로 ‘소요유’라는 것이다.

‘소요유’의 의미 - “소요란 조화롭고 느긋하며 한가롭고 즐겁다는 의미다. 무릇 지극한 이치는 안으로 자족하기에 그 어느 때도 적합하지 않는 때가 없고, 생각을 멈추고 사물에 응하면 그 어디로 간들 통하지 않음이 없다. 이러한 태도로 천하에 노닐므로 ‘소요’라고 말한다.”(당, 왕무야王瞀夜)


2) 북명의 곤

곤 → 붕 → 9만리 → 6개월 → 남명

왜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제시? → 충격요법, 상식의 파괴


3) 물고기, 새로 변하다

⓵ ‘곤’의 본래 의미 - 물고기의 알(작음) → ‘거대함’: 상대주의적 세계관

⓶ 변화론 - {회남자}의 공우애, {예기}의 월령 (22쪽), {주역}의 易

⓷ 질적인 변화 - 수평적 삶(2차원의 세계) → 수직적 삶(3차원의 세계)


4) 대붕의 비상과 자유의 성취

9만리 상공으로의 비상 → 6개월 동안의 비행 ⇒ 오랜 수양을 상징 (불교에서의 頓悟漸修와 유사)

남명 - ‘깨달음’의 세계 / 북명 - 미몽의 세계

(‘북명’과 ‘남명’ 모두 지상의 세계라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차원이 다르다 → 선종의 공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장자의 현세간적 사고 - 깨달은 이후 그것을 대중들과 공유


5) 매미와 비둘기의 비웃음

‘매미’ ‘비둘기’ - 일상적 삶에 매몰되어,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못함, 현실에 안주하여 변화를 꿈꾸지 않음, 成心에 갇혀 변화를 거부

(*. {노자} 41장 -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6) 대붕과 갈매기

이상과 같은 구도는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나단, 비행연습, 은자 갈매기, 귀향, 제자, --



3. 나비 꿈


어느 날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즐기면서 자신이 장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잠시 후 깨어나니 놀랍게도 여전히 장자 자신이었다. 모르겠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 꿈을 꾼 것인지?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물화’(物化)라 말한다. (齊物論)

昔者, 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1) 변화

‘齊物’의 세계에서 사물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불교의 윤회전생론과는 다르다.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


2) 물아일체

자기의 존재를 잊고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자득(自得)하는 소요의 경지

주체와 대상이 아무런 간극 없이 하나가 된 가장 이상적인 상태

‘일원론적(一元論的) 사고’와 통한다

‘나와 물 사이의 간극이 사라진다’는 말의 의미 - 공감(共感), 공명(共鳴)


3) 깨달음(覺)

로버트 앨린슨 - ‘나비의 꿈’을 ‘영혼의 변화’라는 의미로 해석

“나비와 장자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다” → 질적인 변화를 암시

나비 / 장자의 관계 = 곤 / 붕

‘나비 꿈’은 장자가 잠을 자다가 깨어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 → ‘깨어남’: 작게는 장자의 정신적 변화와 성장을 상징, 크게는 미몽의 상태에서 크게 깨달은 경지에 이름을 상징

‘나비’ - 무지몽매한 중생 / ‘장자’ - 혼돈에서 벗어나 크게 깨달음

이는 곧 ‘대붕의 이야기’에서 북명의 곤과 남명의 대붕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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