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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과거의 서울- 1960년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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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파라솔이 해운대만큼 있었던 한강

허금성님은 1951년 흑석동에서 출생하여 한강의 변화를 기억하고 있다. 강원도에서 마포까지 목재나 숯이 한강으로 운반되었다. 한강 백사장은 여름만 되면 수영하는 사람들과 보트 탄 사람, 그리고 비치파라솔이 해운대만큼 즐비했다고… 한강에 뗏목이 강원도 영월에서 마포까지 목재를 운반하고 숯은 긴 조선배가 운반하였다. 새벽에 빽빽거리면 조선배가 올라가는 소리가 기억난다. 북적북적한 한강에는 누리배, 보트, 수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었다. 이촌동 일대가 지금의 해운대처럼 비치파라솔이 펼쳐져 있었다.

기억제공자-허금성, 기억수집가-이남경





겨우내 묵힌 빨래를 하러 갔던 한강 빨래터

최옥자님은 1934년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태어나 전쟁시 진해에서의 피난생활을 제외하고는 계속 서울에서 초중고등학교/다닌 서울 토박이 이다 6.25 전쟁으로 물이 귀했던 그땐 겨우내 빨래를 모았다가 한강의 물이 녹을 때 마포나루터로 가서 빨래를 했다. 빨래를 삶는 곳 따로 있어 돈을 주고 빨래를 삶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겨우내 모았던 빨래를 봄에 한강에 나가서 빨았다. 6,25전에는 마포강에 가면 빨래 삶는 곳이 있고, 삶은 후 모래사장에 널 수 있었다. 듣기로는 빨래 삶는데 돈을 내기도 했었다. 겨우내 더운물 조차도 없었고 물이 워낙 귀하니까 한강에 가서 빨래를 했었다.

기억제공자-최옥자, 기억수집가-김인욱



소, 돼지가 떠내려 가던 장마철 한강

홍혜숙님은 1963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로 흑석동에서 시절 보냈다. 현재는 강남구 삼성동에 거주하고 있다. 70년대 여름 장마철엔 동네 초입까지 물이 차오르는 건 다반사고 한강변에 나가면 소, 돼지는 물론 초가집이 떠내려 오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홍혜숙 씨는 그 모습이 무섭게만 보였다고 어렸을 적 살았던 흑석동은 아직도 변하지 않는 곳이 많다. 지금은 서울시 정책이 잘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장마철에는 한강에 돼지 떠내려가는 것을 구경하러 나가던 기억이 난다. 물이 올라오는 소식이 들려서 장마가 끝날 때 쯤 가면 소나 돼지가 떠내려갔었다. 서울 외곽의 시골집 초가지붕이 떠내려 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 엄청나게 불어난 황토가 무서웠다.

기억제공자-홍혜숙, 기억수집가-조영남



1960년대 판자촌에 홍수가 나면?

이성은(가명)님은 1957년 동대문구 중랑천변에서 나고 자란 덕에 애정이 각별하다. 장마철에는 중랑천이 항상 범람했다. 둑 안쪽으로는 판자촌이 모여있어서 항상 잠겼다고 하는데, 홍수를 이겨낸 중랑천 판자촌민들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해마다 홍수가 나면, 중랑천 폭이 굉장히 넓은데 완전히 물에 잠겼다. 판자촌이 모여 있는데 비가오면 개천 에 살던 사람들은 집이 물에 잠겨서 가재도구를 싸가지고 올라와 천막 위에 올라가 밥도 해 먹었었다. 장마철에는 한강이 가까워 물고기들이 올라왔었는데, 뜰채로 굉장히 큰 메기를 건져서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에게 매운탕을 끓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집이 통째로 떠내려 오거나 돼지가 떠내려 오기 도 했었다.

기억제공자-이성은, 기억수집자-박현숙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린 청계천

이상군님은 1952년생으로 서울시 중구 예장동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며 중구 일대의 변천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청계천이 개발되면서 더러워진 청계천을 덮고 고가도로 내고 물류 운반하도록 차가 다녔다. 지금은 복원공사로 고가도로가 없어지고 청계천을 다시 볼 수가 있다. 청계천이 복개하기 전, 판잣집 밑으로 물이 흐르는데 화장실이 막힌 곳이 없이 뻥 뚫려서 청계천으로 오물이 그대 내려갔었다. 복개하면서 살던 사람들은 상계동으로 이동하였다. 옛날에는 청계천에서 빨래를 했었다고 하는데, 산업화가 시작하면서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복개공사를 한 거죠. 원래는 푸른 물이었는데 생활하수가 많아지고 지저분해져서 워커힐 쪽으로 시간 단축도 할겸 도로를 냈던 것 같다.

기억제공자-이상군, 기억수집자-조영남



전자와 마차가 다니던 서울

김정원님은 1942년 광희동에서 태어났고 6,25 전쟁 중에 대구로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와 중부시장 맞은편에서 살았다. 5-60년대에는 횡단보도가 없어서 마구잡이로 힁단하였다. 말마차 소마차가 다니고 전차를 타고 다녔다. 도로도 비포장이라 비만 오면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길이었던 뚝섬 유원지는 장화 없이 살 수 없었다.

5-60년대만 해도 한꺼번에 행길을 건너가도 통제하는 사람이 없었다. 현재는 발전이 되어서 교통이 정리된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신호등이 있고, 건널목이 정해져 있는 것이 차가 다니면서 복잡해지니까 생긴 것 같다. 옛날에는 소마차 말마차니까 아무 데나 건너는 것이 건널목이었다. 어디 가려면 전차 외에는 없었다. 특히 뚝섬 쪽은 아스팔트 길도 아니고 흙바닥이어서 장화 없이 못 살았다.

기억제공자-김정원기억수집가-류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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